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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Book] 은하영웅전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념 때문에 100년 넘는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뒤이어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정립되었다. 냉전도 끝난지 오래지만 현재 계속된 북한의 도발과 러시아와 중국의 대북제재 비협조는 또다른 냉전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냉전 시기는 가장 많은 국가들이 함께 뭉쳐있던 시기였다. 언어와 피부색, 심지어 붙어 있는 대륙이 다를지라도 그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에 따라 같은 편이 되었고 같은 민족, 같은 조상, 분단된 가족들이라도 서로 다른 체제의 지역에 속하면 서로를 적으로 간주했다. 이렇게도 이념이라는 것은 애매모호하면서도 사람을 단칼에 이분법적으로 만드는 폭력적인 시스템이다. 어떤 이념이라도, 모두 인간이 정의와 공정, 윤리에 대한 철학이 녹여 인간 스스로 만든 시스템이다. 이전의 왕조에 비하면 이 시스템들은 얼마나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들어가 있고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녹아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조는? 승리자가 써내려가는 역사일 뿐이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전제주의는 도태되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또한 아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공통적으로 가난과 부정부패가 도사리고 있는 틈바구니에서 어김없이 독재자의 탄생이라는 독버섯이 자라나고야 만다. 그것은 둘 중 어느 한 시스템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결함 때문에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독재자들은 필연적으로 왕조의 시초가 되려고 노력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기가 우연히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발생한 2016년 9월부터 였다. 덕분에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부패한 민주주의가 가리키는 표상이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실제로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은하영웅전설' (이하 은영전)을 읽으면서 지난 60년 간 격동의 정치사를 겪었던 대한민국에 대해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회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말로 국민들을 현혹하고 국민의 안전과 안보라는 명목 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 정적들을 제거해나가는 사회. 그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애국심. 그것은 마치 전주의의 향연처럼 보이는 동시에 선량한 나머지 국민들을 선동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국가는 시민의 복지와 민주공화정의 이념을 실현할 수단의 구체화이며, 그자체의 존립은 아무런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을 명심하라. 예로부터 국가를 신성시하는 자는 반드시 국민에 기생하는 자였다. - <은하영웅전설> 中 -"

애국심을 호소하며 국가의 많은 젊은이들을 불필요한 전쟁터로 내몰지만, 정작 애국심을 외치는 각료들은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고 애국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애국심을 외치면서 추구하는 가치는 오로지 권력의 쟁취, 개인의 안녕 뿐이다. 은영전에서는 트뤼니히트 의장과 양웬리의 갈등을 통해서 이와 같은 민주주의 헛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이 잔혹함을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의와 신념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유혈을 선호한다는 것을 이 순간 모두들 이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최고 지도자가 연호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의 신념이 배를 채울 때까지, 무수한 병사가 산 채로 불에 타고 팔이며 다리를 잃어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 통치자가 정의와 신념을 내버린다면 병사들은 터진 배에서 비어져 나온 내장을 바라보면 공포와 고통 속에 죽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전장에서 먼 안전한 장소에 있는 한 권력자들은 정의와 신념이 인명보다도 훨씬 귀중하다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 <은하영웅전설> 中 -"

안보팔이를 통해서 여론을 형성하고 집권하려는 어느 집단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작가는 미래에 양웬리와 라인하르트의 대결을 서술하는 제 3 의 역사가의 시점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논점에 대해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남기곤 한다.

""예를 들면 주전파 정치가, 관료, 문화인, 재계인을 모아 '애국 연대'를 조직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국군이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적에게 돌진하는 거지요. 우선 그 전에 집부터 안전한 수도에서 최전선인 이제르론 요새로 옮기심이 어떨까요? 자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은하영웅전설> 中 -"

"신념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금전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하등하다. 왜냐하면 금전은 만인에게 공통된 가치를 지녔으나 신념의 가치는 당사자에게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은하영웅전설> 中 -"

혹은 이 역사가 시점에서 이야기를 읽어가는 독자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전제주의란 변혁을 추구할 떄는 그야말로 지극히 효율적인 체제였다.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에 싫증난 시민들이 언제나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 위대한 정치가에게 강대한 권력을 주어 개혁을 추진시켜라!" 역설적이지만 민중은 언제나 전제 군주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 <은하영웅전설> 中 -"

"우리에게 주권은 필요 없다. 참정권 따위 무슨 소용이 있나? 실제로 카이저가 선정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전권을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정치 제도는 시민의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한데, 그것이 이루어진 이상 답답한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 <은하영웅전설> 中 -"

"장래 폭군이 출현할 가능성을 없애고자, 현재의 명군을 무력으로 타도하고 구너력 분립과 제한을 주지로 하는 민주공화정치 제도를 존속시킨다.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순이 아닐까? 민주 정치 제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명군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 <은하영웅전설> 中 -"

은하영웅전설은 책 제목만 들어서는 일본 라노벨 책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1982년에 출간된 이 시리즈는 인류가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한 끊임없이 다시 읽어볼만한 명작이다. 우주에서 펼쳐지는 삼국지라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이념과 군사전략, 사회와 종교, 인간 등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폭넓게 다룬다. 40년이 다 되가는 작품이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의 식견에 놀라고 이 소설이 일본에서 태어난 것도 매우 놀라움을 안겨준다. 10권의 주요 스토리와 5권의 외전으로 구성되어있다.

책의 내용을 말하기 전부터 서론이 길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부분들 때문이다. '은하영웅전설'을 단순히 우주 SF 물로 분류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먼저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착한 사람이 이기고 악은 패한다는 권선징악의 메세지도 아닐 뿐더러 주인공이 사기적인 능력으로 혼자 헤쳐나가는 이야기도 아니다. 부패한 민주주의와 유능한 왕권 전제주의라는 설정을 통해 단순히 항상 민주주의가 좋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시스템적 근간을 흔드는 질문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태어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고 아마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다른 시스템에서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당연히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는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여러 약점(언론과 정치인, 기업가의 유착 등)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 시스템에 안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동시대에 태어난 어느 두 영웅을 따라가고 있다. 제국의 전 우주 통일의 유일한 방해물은 양웬리지만 라인하르트와 양웬리 둘 다 서로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운명이 서로를 끝까지 같은 배를 타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제국에서 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결국 왕좌의 자리까지 올라 전 우주를 손에 넣고 개혁과 선정을 펼치려는 라인하르트. 우주 구석의 자유행성동맹에서 태어나 동맹의 자유민주주의를 겪으면서 신념과 이념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천재 지략가인 군인 양웬리, 그의 의지와 신념을 받든 양자 율리안까지 전 우주의 평화를 바라고 시작한 전쟁이지만 결코 평화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 시작된다. 라인하르트, 양 웬리, 율리안 뿐만 아니라 각 진영의 흥미로운 캐릭터들과 드넓은 우주에 펼쳐진 4국(제국, 자유행성동맹, 페잔, 지구교)은 각자 자신들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정략,지략 싸움을 펼친다는 점에서는 현대판 삼국지라는 평이 딱 떠오를 정도로 흥미 진진하다. 기존에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유능하고 청렴한 왕조를 건설한 라인하르트. 이러한 라인하르트의 진격을 막고자 자유행성동맹의 열악한 지원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는 양웬리. 속을 알 수 없는 지구교와 페잔의 갈등은 점점 더 심화되면서 많은 주제를 다룬다. 주제를 다룬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소설 속 이야기가 단순히 독자들의 '읽기'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고 재미를 주는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들을 양산해낸다.  특히 정치적 신념, 이념, 사회, 인간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어 어렵고 딱딱한 정치철학, 인류학, 사회학 책에서나 다룰 법한 이야기를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정의해보고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보다 먼 미래, 먼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임에도 우리가 재밌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속 캐릭터의 힘과, 더 나아가 작가의 역량에 찬사를 보낸다. 우주 전체의 장기판을 보는 전략,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전술과 장수들, 인류를 앞으로 이끌어갈 정치체계까지. 미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고 현재의 삶을 다시 체감하게 되는 소설. 강력하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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