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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이제까지 내 나름대로 동년배 중에서 혹은 내 주변에서 책 좀 읽었다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일고 아직 한국 현대 문학의 거인들인 박경리, 박완서의 책을 읽지 못했으면서
독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그 옛날 MBC 예능 느낌표에서 추천을 해서 누군가가 집에 구비해둔 책이었지만 
10년이 가까이 지나도록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안락한 집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 내가 이 책을 들고 타지에서 읽고 있는 것 또한
몇 겹의 우연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일 것이다.

기억을 따라 소설을 쓴다는 박완서의 말이 꼭 들어맞는 소설이었다.
머나먼 어렸을 적 기억이지만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그 당시의 삶을 바로 몇일 전에 겪은 것 마냥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일제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 전쟁까지, 격동의 현대사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소녀 박완서의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아주 맛깔난다.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가 그 당시를 살아보지 못했으나 그 향까지 복원한 것 같은 묘사와
할아버지, 엄마, 오빠라는 주인공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추억과 평가, 각각의 에피소드는 책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요즘 소설이나 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단어들(그것이 비록 한자 단어일지라도)에 눈이 많이 갔다.

일제강점하에 관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창씨개명은 극구 반대하는 할아버지와
그 어려웠던 현저동 시절 혼자 쌀밥을 먹으면서도 ‘인민동지'를 공감하는 오빠,
도덕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두 아이를 혼자 키워내야했던 모순이 많던 엄마 등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에 평범한 사람들이 겪었던 혼란과 모순을 잘 그려내고 있다.

시대적 혼란을 관통하는 그의 가족사는 그의 말대로 기억을 따라 쓰지않았다면
도저히 꾸며낼 수 없는 그 당시 평범한 일상은 ‘역사 앞에서’와는 또 다른 민주의 역사 현장 고백이다.

가끔 전혀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꾸며볼려고 하면 턱하고 막히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특히 살아보지 못한 과거를 배경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살아보지 못한 미래 시대를 그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의 이름을 잃어버린 세월과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들 속에 직접 살았던 평범한 소녀의 
'요동치는 역사 앞에서’ 그녀가 이야기를 하게될 것임을 직감하는 마지막 장면이 참 인상적인 소설.

읽고 나면 이 다음 이야기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와 이때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은 <미망>을 읽고 싶어진다.

“나는 마치 상처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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