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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역사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보며

사진:  Unsplash 의 Mika Baumeister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역사란 이미 벌어진 사건 그 자체 이외에도 사건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시각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최근 정치권과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때아닌 역사 논쟁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모두가 각자의 정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고 서로가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그 역사는 바로 건국 시점까지 이어져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는 쉽게 좁힐 수 없는 부분이다. 서로 다른 정신을 가지고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최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양극화에도 이러한 ‘정신’적 차이가 많은 부분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통사에는 형체인 나라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인 역사는 남아있다고 기술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형체인 나라는 존재하나 정신인 역사는 사라지고 있다.

이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이것을 역사적 논쟁으로 부르려면 국방부 브리핑이나 가짜 뉴스 유튜브가 아닌 학회와 논문을 통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프레이밍이 너무나도 저질인 부분이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뒷받침하여 듣는 이를 설득하는 과정은 없다. 근거와 증거 없이 오직 주장만 외치고 있는 한심한 떼쓰기를 볼 때마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근거가 없는 주장에는 논쟁을 할 수 없다. 이들은 근거 없는 주장을 점차 믿게 되고, 그 믿음이 다시 주장의 근거가 되는 역행하는 무한동력의 굴레를 볼 때마다 나는 무기력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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