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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 주제로 보는 한국사 3 - 조선편

주제로 보는 한국사 2- 고려편이 역사에 대해서 몰랐던 사소한 것들 혹은 흥미로운 것들 위주로 주제를 선정하였다면
주제로 보는 한국사 3- 조선편 은 더 이상 웃으면서 보기 힘든 책이 되버렸다.

심리적으로도 이 시리즈 3권의 책 중 가장 가까운 역사이기도 하고 우리의 근현대사와 맞물려있는

그야말로 지금과 직접적인 연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조선이 남긴 영향력 아래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역사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현재 사회를 둘러보면 과거 조선이 걸어갔던 길과 같은 패망의 길을 걷고있는 모습이 어느정도 오버랩되기에

역사에 대한 인식은 생존과도 관련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조선 몰락의 문제점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대명의리론에 사로잡힌 소중화사상이다. 이는 다른 혁신적인 사회,문화에 대한 상상을 억제하는데 효과적이었다.


" 물론 북학론은 당시 사상계의 부분적인 움직임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사대부는 여전히 기존의 화이론과 그에 입각한 대명의리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양란 후 200년간 정신적 지주였던 대명의리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를 제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 대명의리론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고종 때까지도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남녀평등 경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에 따라 변하게 된다… 실용적인 노선을 취하던 광해군의 대북정권을 전복시키고 집권에 성공한 서인정권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외적으로는 숭명배청의 대의명분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강상 우선의 위계적인 예법 질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그 결과 예제 역시 종래의 부부,부모,자녀라는 수평관계에서 부-부-자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수직관계로 재편됨에 따라 부부,부자,군신,적서,주노,장유의 철저한 상하,주종관계를 채택하였다. 이런 반동정책의 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열녀 만들기였다."

책에서 볼 수 있다시피 대명의리론이 아닌 소중화사상이 팽배했다. 실제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문화를 되내이고 기억하는 걸 넘어서 작은 중국이 되고자 했다.


명나라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곳곳에 명나라와 관련된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었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지배층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화 문명의 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조선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야만족으로 생각하여 현실관계에서는 사대하였으나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중화 사상의 쇠퇴로 보았으며,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from 위키 백과


이는 실제 조선이 명나라에게 복종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유교적 사상의 근원지를 잃어


조선의 정신적 뿌리를 잃는 크나큰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선이 그 이후로 사회,문화적, 외교적으로도


보수적 자세를 취하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정약용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하나의 털끝만 한 것까지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 곧바로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라고 단정 지을 정도였다.
이 른바 실학자들은 해체 위기에 직면한 조선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토지제도를 비롯한 각종 사회개혁론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론이 바로 오늘날 실학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학은 조선 왕조체제라는 주자학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보수적인 개혁론일 뿐 근대 지향적 하문이나 사상은 결코 아니었다."


두 번째는 하층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작농, 일반 백성들의 임금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백성들이 굶고 무거운 세금에 짓눌려 살면서도 임금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와 함께


백성들의 분노와 야유를 몸소 받아내는 이전,향리, 그 밖의 관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과 세력들은 그러한 분노의 화살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폭발을 막아주는 완충제 역할을 그 중간 단계의 관리가 맡고 있는 셈이었다.


구한말 선교사 힐버트 < 대한제국사서설>
“아 전(향리)은 모든 사람들이 저지르는 과오에 대한 속죄양이며, 기관실의 폭발을 막아주는 안전판의 구실을 한다. 만약 그들이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것의 반 정도라도 악덕한 무리들이라면 그들은 오래전에 국민들에 의하여 축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의 고장에 붙박이가 되어 만약 주민들의 인심을 잃게 되면 새로운 풀밭에 방목될 수가 없고 오랫동안 그 후환을 겪어야만 한다. 그들의 가족과 재산은 그 지역의 볼모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주민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과 수령 방백수령 사이의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방백수령의 탐욕을 억제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분노를 어루만져야만 한다."


“한국민들이 그토록 심한 억압과 실의 속에 살면서도 정치제도만은 수세기 동안 꾸준히 계속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전제도 덕분이다. 외국인들도 처음에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그런 제도를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하지만 서울에 있는 관리들이나 방백수령들의 착취 행위에 대한 몸서리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대개 수긍하게 된다. 그러한 제도가 존속된 것은 오로지 아전제도에 그 이유가 있다. 국가를 커다란 선박에 비유하면 아전은 닾과 같아서 주기적으로 밀여왔다가 밀려나감으로써 배를 난파시키는 험한 조류로부터 국가라고 하는 대선박을 붙잡아 매어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의 방향을 멸망과 파탄으로 이끈 임금과 중앙집권세력에 대한 분노가 없었기에 조선에서는 서양의 역사가 보여주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혁명과 쟁취가 존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다. 조선건국 자체가 위화도 회군에 이은 반란의 결과였지만


조선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유니 평등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하게 500년 가까운 시간동안 백성들의 눈과 귀와 정신을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떄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가려진 눈과 귀를 열고


과거를 배우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누군가 쳐놓은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 영국인 이사벨라 비숍

“사람들은 동학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시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의 선언으로 판단해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의 가슴속뿐이라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동학군에게는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이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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