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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Review/ 연극]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연극은 산 속 고개를 넘어가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로 출발한다. 극장 내부 특유의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황금색 태양빛을 내뿜는 조명은 늦봄의 더위를 느끼게할 정도로 무대를 노랗게 칠했다. 징-하는 백열등 소리와 함께 무대 위는 불길하면서도 무거운 공기로 가득찼다. 관객은 아무런 시대적 설명이나 인물에 대한 소개를 받지 못하고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들로 상황과 인물을 알아나갈수 밖에 없다. 마치 소설의 전개처럼 흐릿했던 인물들과 갈등이 조금씩 구체화된다. 두 부부가 목적지를 향하며 골짜기를 넘으면서 나누는 모습에는 별다른 특별함이 없었음에도, 분명 햇살은 밝게 골짜기를 비추고 조그맣게 나있는 황토길 옆에는 풀과 봄 내음새를 뿜어내는 꽃들이 만발해있는 완연한 봄인데도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선명한 햇빛과 그 따스함에 취해 잠깐 스치는 듯한 풀밭 위에서의 낮잠을 자고나면 등어리에는 땀이 살짝 베어나오던 어느 봄날이 생각났다. 잠에서 막 깨어난 나른함과 피부와 옷이 쩍 달라붙어 느껴지는 불쾌함이 뒤섞인 그런 도입이었다.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부부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천천히 갈등의 고개를 보여준다. 남편이 극 중에서 사람 마음에는 과거로 가는 문이 하나씩 있는거야라고 수야에게 말한 것처럼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게 오고간다. 무대 뒤에서 복장이나 분장을 바꾸는 단순한 회상씬이 아니라 수야의 어릴적이 나오는 장면에는 배우가 웅크리고 앉아 아이의 목소리를 직접 낸다. 현재의 흐름 속에 과거를 자연스럽게 녹아내는 방식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어머니를 제외한 두 주인공은 연극이 시작한 뒤 단 한번도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는다. 순간순간 과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 전체에 흐르는 갈등의 고조와 전개가 현재와 미래,과거가 뒤섞인 시간의 재구성을 통해 들어난다.

그 시와 같은 대화 속에서 수는 먼저 미래를 걱정한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 자신이 존재가 흐릿해질 미래, 그럼에도 주인공의 사랑이 계속되어질 수 있는지, 자신의 모습은 계속 변화해가는 데 (어린 수야- 성장했지만 몸이 아픈 수야- 곧 존재하지 않을 수야) 계속해서 사랑해줄수 있냐고 묻는다. 그리고 남편이자 오빠는 가장 핵심적인 대사로 이 우문아닌 우문에 대답을 한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다가 어느 모습을 가지고 어느 시간에 있어도 바다 바로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닌가 하면서. 그리고는 과거를 걱정한다. 격정적이었고 순수했던 과거. 아픔과 공허함 속에서 핀 사랑. 그 사랑은 진실이었느냐고. 단순한 외로움이나 연민이라 후회하지 않는지 묻는다. 현재에서는 끊임없이 발작을 일으키며 약을 먹고 생명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해나간다. 현재와 과거, 미래를 어떤 순서로 나열할지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 맞딱뜨리고 있는 현재, 움직이지 않는 과거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어 바뀌지 않을 미래,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과거, 불확실한 현재라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기 힘들어한다.

배우로 데뷔한 정석원이 연기한 오빠이자 남편인 역할은 이 극의 내러티브를 초월하는 인물이다. 과거 피붙이 하나 없는 고아에서, 선택받은 가족이 생기고, 금지된 사랑을 품는다. 그리고는 끝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움직인다. 이에 격렬히 반대하는 어머니 또한 같은 인생이었음을, 그리고 먼저 떠난 부친 또한 자신들 오누이와 같은 처지에서 사랑을 했음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는 극에 치닫는다. 어머니가 자신을 입양해온 이유가 자신의 의남매이자, 남편의 모습을 어린 아이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고 반대했던 이유도 자신들과 같은 삶을 살게하고 싶지않은 사랑이었음을 고한다. 결국 어머니의 남편이 투영된 대상이자 수의 오빠였고, 다시 수의 남편으로서 혼자 남겨진다. 네 명의 가족 모두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모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속해있었고 마지막에서는 반복된 아픔과 간헐적인 고통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했음을 보여준다. 가족이 피붙이라고 일컫는 생물학적인 단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아니 그보다 더 현실적으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구성의 단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다시 피붙이 하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그는 과연 또다시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등을 긁어주는 장면이었다. 등긁기, 그것은 무대에서 보여준 부부간의 최고의 애정표현이었으며 수가 숨이 넘어가면서도 주인공에게 해주려고, 전달하려고 했던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있던 엔딩이었다.

봄날이 간다는 좋은 시절이 지나간다는 의미일까? 그 봄날은 고통과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찼던, 외로움의 한기에 몸서리치던 겨울을 지나 서로에 대한 오해의 불식과 사랑과 이해를 싹 틔운 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봄날이 지나가고 나면 모든 것이 아찔하게 만발하는 여름에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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