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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민주주의를 멈춘 500자

12.3.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던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어느 때처럼 애들을 재우면서 옆에서 같이 한 숨자고 거실로 나와 ‘재밌는 뭔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지다가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회견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안 그래도 소통하기를 꺼려하고 국민 앞에 서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대통령이, 밤 10시 20분, 사람에 따라서는 야심한 밤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그 시간에 갑자기 예고하지 않은 대 국민 발표를 한다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얼른 뉴스를 하고 있을 것 같은 JTBC 채널을 틀어보니, 한문철의 블랙박스 방송을 중지하고 대통령의 발표를 송출하고 있었다. 회견 자체의 늦은 시점에도 놀랐지만, 회견 내용은 더 놀라웠다. 종북 세력이 국회를 장악하고, 나라를 좀 먹으며, 국가의 미래가 풍전등화라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던 터였지만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다.

앞에 내용은 ‘저런 이야기를 이 시간에 하려고 방송을 잡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상계엄 선포라는 단어에서부터는 현실과 비현실의 분기점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부터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준비가 있었던 것처럼 곧 포고령과 국회 진입을 막는 경찰이 나타났다. 국회 내부와 외부에서 진행되는 라이브는 유튜브 등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게 송출하고 있었다. 내부에서 계엄 해제 결의가 진행되는 동안, 바깥에서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는 모습 또한 바로 볼 수 있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사고를 일으킬 것이 가장 걱정되어 조마조마했다. 아마도 총이 발포된다면(하늘을 향하던, 사람을 향하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사태가 흘러갈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2.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을 기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가짜뉴스, 여론조작, 허위선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파업, 태업, 집회행위를 금한다.
  5.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
  6.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상의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 9조(계엄사령관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 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2024.12.3.(화)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

포고령은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에도 이상함을 넘어 기괴함이 느껴진다. 지난 70년 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500자도 안 되는 글로 역행시키려는 시도에는 코웃음이 쳐졌다. 하지만 곧 누군가는 이걸 정말 믿고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공모와 계획이 있다는 것은 부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부역자들이 진실로 비상계엄을 할 상황으로 믿고 실행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이고, 히틀러에게 더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집단 학살을 저지른 나치의 누적적 급진주의처럼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부역했다면 그것은 시스템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이제는 부역자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계엄을 주도한 세력뿐만 아니라 그 지지자들까지도 법원을 습격하고 경찰을 공격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첫 계엄 선포처럼 그 지지자들은 민주화 이후 첫 법원 습격이라는 똑 닮은 행동으로 내란을 이어가고 있다.

이 사태가 수습이 가능할까? 계엄 선포 이전에도 우리 사회는 다시는 통합할 수 없는 분단이 있어 보였다. 이제는 완전히 돌아갈 길은 막힌 상태로 각자의 길을 가고 있기에 다시 화합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계엄 선포라는 생각지도 못한 기괴한 방식으로 개회 선언이 시작된 이 내란 사태는 갈수록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을 야기할 것이고, 양쪽 모두 그 상처 때문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길로 떠밀리듯 내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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